돌아가기

3-2-J

그때, 재해지역은

그날 이후의 발걸음

(이재민 증언을 기초로 구성한 것입니다.)

2011년3월11일

대 쓰나미 내습

큰 쓰나미였어요.
쓰나미가 온다고 생각했어요.

소방단원이라 수문을 닫으러 갔어요.
대피하는 도중에, 대피하지 않고 남아있는 사람이 없는지 집집마다 확인하며 갔죠.
아직 집에 있는 사람에게 대피하라고 말했어요.
“뒤따라갈게요”라고 했는데, 오지 않은 사람이 있었어요.
억지로라도 데려올 걸 그랬다고, 후회했죠.

멀리 보이는 섬을 쓰나미가 삼켜버리는 것을 보고, 큰 쓰나미가 올 거로 생각해서, 산 쪽으로 피했어요.
“쓰나미다, 대피하라” 하고 외치면서 달렸어요.
그걸 듣고 대피하기 시작하는 사람, 당황해서 달리기 시작하는 사람도 있었죠.
그래서 몇 사람인가는 목숨을 구했지만, 늦은 사람도 있었을 거예요.

“살려줘요”하는 소리가 들려도 구할 수 없었어요.
파도 속으로 들어갈 수도 없고, 떠내려가는 사람을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죠.
떠내려가는 곳을 지켜보려고 했지만, 차츰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됐어요.

가족들과 아는 사람들이 대피하고 있을 것 같아서, 공민관으로 향했어요.
도로가 잔해로 막혀 있었기 때문에, 암흑 속에서 방조제 위를 걸었죠.
멀리 불이 나 있어서, 그 희미한 빛으로 어떻게 어떻게 나아갔어요.

방조제에서 쓰나미로 부서진 집의 지붕위로 옮겨가서, 이번엔 그 위를 걸었어요.
미끌미끌해서 제대로 나아갈 수가 없었어요.

무너진 집들 아래에서 신음소리가 들렸어요.
‘나중에 구하러 올 테니까 기다리고 계세요…….’
그렇게 생각하면서 갈 수 밖에 없었죠.
혼자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일단 대피했는데, 집으로 돌아가서 사망한 사람도 있어요.
아이를 데리러 학교에 간 사람도 있었죠.
대피소 화장실이 가득 차서, 집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어요.

추운 밤이었어요.
가까이에 있었던 공사현장 합숙소에서는 작업하는 사람들이 대피해온 고령자를 들어오게 해서 찬 몸을 녹이게 하며 도왔어요. 자신들은 밖에 나가고.

이날 밤부터 인근 지구에서 무료급식이 시작돼서 주먹밥이 대피소에 전해졌어요.
주먹밥을 바구니에 넣어 짊어지고 선로를 걸어서 가져와 줬어요.

2011년3월12일

하룻밤이 지나

소방단은 동이 트자마자 활동을 개시했어요.
아침에는 자위대, 경찰, 소방이 도착해 있었죠.

주민들은 쓰나미가 빠져나간 동네로 나왔는데, 여진이 심해서 그때마다 소방차 마이크로 대피를 호소했어요.
위험했지만 주민들에게 가지 말라고는 할 수 없었어요.

도로를 가로막고 있는 집을 중장비로 옮길 때마다 시신이 발견되어 작업이 중단되었어요.

집 이층에 남아있던 사람 등, 7명을 구조했어요.
인명구조를 우선으로 활동하고 있었어요. 시신은 그대로 두고.

물자를 모아서 임시 구호소가 만들어졌어요.
약이 없어서, 병원에 가지러 가는데 같이 갔어요.
혼자 걸을 수 없는 어린이를 구호소로 옮겼어요.

이날 밤부터 중학생이 자주적으로 짐 운반 같은 것을 도와주었어요.
중학생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 있어요.
쓰나미가 오기 전부터, 재해가 발생했을 때에 대해 중학생들과 의견을 교환하고 있었어요.

2011년3월13일

몰라보게 변해버린 동네에서

화재가 계속되고 있었어요.
충분한 장비가 없는 가운데, 활동을 계속했어요.
주민이 대피하고 있는 절 등으로 불길이 번지는 걸 막기 위해, 호스를 이어서 소화 활동을 했죠.

산림화재에는 헬리콥터로 소화활동을 했어요. 부근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면서 진행했어요.

이날도 인명구조를 우선으로 활동하고 있었어요.
그러나 우리는 이날 이후, 생존자를 확인할 수 없었어요.

시신을 발견하면 그 위치에 표시를 하고, 발견장소와 시각을 경찰에 알렸어요.

가족과 친척을 찾으러, 다른 곳에서 오는 사람이 늘었어요.

소방단의 한텐(겉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말을 걸어오는 사람이 많이 있었어요. 전언도 부탁받았어요.
대피소 장소, 가족, 친척, 지인의 안부, 알고 있는 것을 알려줬어요.

대피소를 떠나는 사람이, 어디로 가는지 알리려 왔어요.
대피소에 필요한 주먹밥의 수를 지원자에게 전했어요.

많은 소방단 동료들이, 돌아갈 집을 잃었어요.
집이 남아있는 사람도 돌아가지 않고, 같이 숙박하면서 활동을 계속했어요.

2011년3월14〜18일

생명을 이어간다

72시간은 인명구조를 최우선으로 활동을 계속했어요.
아직도 수색이 계속되었죠.
부서진 집 안을 전부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어요.

소방단원에게 탈이 난 사람이 늘기 시작했어요.
발 디디기가 힘든 곳을 계속 걷다 보니 무릎이 아픈 사람, 못을 밟아 발바닥을 다친 사람 등.
처음 3일간은 거의 잠을 자지 못한 상태였어요.
휴식시간 확보가 과제였죠.

머리가 멍해서, 하루가 길게 느껴졌어요.
소화활동도 계속되고 있었어요.

이 무렵부터 수상한 사람이 눈에 띄기 시작했어요.
밤 순찰의 요망이 있었죠.
쓰나미로 직접 피해를 입지 않은 지구의 소방단이 맡아 주었어요.

대피소였던 곳의 바닥 청소를 했어요.
시신 안치소로 삼기 위해서였던 것 같아요.

3월18일에 일제 합동수색이 있었어요.

2011년3월19일〜8월11일

살기 위해

대피소가 통합되게 돼서, 그때까지 있었던 대피소를 나왔어요.
대피생활이 계속되었어요.
앞이 보이지 않는 불안으로 잠 못 자는 밤도 있었어요.

가설주택으로 입주가 시작되었어요.

가설주택은 동네에서 떨어진 장소에도 지어졌어요.
장사를 시작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한 상점주인들도 있었어요.
사람이 모이는 장이 만들어져 갔어요.

학교건물이 피해를 입은 학생들은 다른 학교의 교실에서 공부하고 있었어요.
어린이들의 모습이 어른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죠

6월18일에 재해발생으로부터 100일째의 합동위령제가 있었어요.
우리가 찾고 있던 실종자 이름을 보게 돼서, 시신이 발견된 것을 알았어요.

여름이 오고 오본(명절)을 맞았어요.

지진재해쓰나미 후 5년간

앞을 향해

몇 번이나 대피처를 옮겨야 해서, 주소가 3번 바뀌었어요
그때마다 주소변경을 알릴 필요가 있었죠.

이 지역의 상점주인들과 가설공동점포를 열었어요.
가설공동점포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가는 장이기도 했어요.

가족이 쓰나미를 봤기 때문에 낮은 땅에는 살고 싶지 않다고 해서, 높은 곳에 집을 지었어요.
안심하고 살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죠.

높은 곳으로 이전하면서, 재해 피해 전에 이웃이었던 사람들과는 따로따로 헤어졌어요.

가설점포에서 신설 정식점포의 재건을 목표로 삼았어요.
자재 값 폭등 등으로, 재건을 위한 비용이 늘었어요.

재건의 도달점은 각자 달랐어요.
각자가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어요.

마쓰리가 있으면 이 지역에서 나갔던 사람들도 돌아와요
모두, 마음은 이 지역에 있는 걸로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