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을 구했던 행동이 주는 교훈
Case-1 이와테현 히로노초 야기 지구의 사례
방조제가 없어도 평소의 대비로 희생자 제로
히로노초(인구 1만 9,514명, 2011년 3월 31 현재)에서는 동일본 대지진 쓰나미로 인한 사망자, 실종자, 부상자가 제로였습니다. 피해가 컸던 이와테, 미야기, 후쿠시마 3현의 연안 지자체 중에서는 유일했습니다. 12m의 방조제로 피해가 경감되었습니다. 지형적 제약으로 인해 마을 내에서 유일하게 방조제가 정비되지 않았던 야기 지구에서도 11.6m의 쓰나미가 몰려와 건물 피해가 나왔지만 희생자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히로노초에서는 매년 쇼와 산리쿠 쓰나미가 발생한 3월 3일 새벽에 방재훈련을 실시해 왔습니다. 하지만 참가자가 해마다 감소했기 때문에 2006년부터 다시 검토하게 되어 주민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일요일 낮으로 훈련일을 변경했습니다. 고지대로의 대피경로를 정비하고, 소방 단원의 퇴피나 저지대로 이어지는 마을길 폐쇄를 훈련 메뉴에 추가하는 등 계속 개선시켜 왔습니다. 2008년부터는 각 지구에서 자주방재조직이 만들어졌고, 야기 지구에서는 평소부터 고지대로 대피하는 비탈길의 제초와 제설을 실시하고, 길가에 해발 표지판을 설치해 누구나 항상 자기가 있는 장소의 높이를 인식할 수 있는 구조를 도입하는 등 주민들에게 쓰나미에 대한 위기감과 높은 방재의식이 침투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나날의 노력 덕분에 지진재해 쓰나미 당일 모두가 서로 안부를 물으면서 신속히 행동함으로써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주민 전원이 무사히 대피할 수 있었습니다.
Case-2 이와테현 구지국가석유비축기지의 사례
이상을 눈치챈 적확한 판단과 연 3회의 쓰나미 대피 훈련이 큰 효과를 발휘
구지시 나쓰이초의 구지 국가석유비축기지는 지상 시설 약 8ha, 지하의 저유시설 지구 약 26ha의 거대한 시설입니다. 석유 수입이 중단되는 등과 같은 불의의 사태에 대비해 지하 42m 암반탱크에 당시 비축되어 있던 원유는 167만㎘, 전국에서 사용하는 석유의 4일분, 이와테현의 1년분에 해당하는 양이었습니다.
지진 쓰나미 당일 14시 49분, 비상용 자가발전으로 겨우 볼 수 있었던 TV 방송에서 대형 쓰나미 경보 발령을 확인한 소장은 즉시 "대형 쓰나미 경보 발령, 대피하라!"라며 구내에 일제 방송으로 지시했습니다. 암반탱크로 이어진 방조문을 닫고, 기지 내에 있었던 직원과 협력업체 사원들은 차량을 타거나 도보로 고지대의 지정대피장소로 서둘러 갔습니다.
지하 시설로 이어지는 서비스 터널에 있었던 3명은 무선연락으로 대형 쓰나미 경보를 알게 되어 서쪽 갱구에서 대피했습니다. 또한 점검 작업으로 비상방송설비가 없는 A작업 터널에 있었던 2명은 터널 안에서 들려온 철벅철벅하는 물소리를 들었습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상 평소와는 다른 낌새를 감지한 이들은 상황 확인을 위해 스스로 갱 밖으로 나왔고, 그 덕분에 대피하는 사람들 행렬에 가세할 수 있었습니다.
15시 10분, 기지 내에 있었던 55명 전원이 대피를 완료했습니다. 고지대로 통하는 대피계단을 설치하고 연 3회의 지진 쓰나미 대피훈련을 실시하는 등 철저히 준비해 온 쓰나미 대책이 신속한 대피로 이어졌습니다.
Case-3 이와테현 노다무라의 노다무라 어린이집 사례
평소부터 해 온 훈련의 성과 높은 방재의식으로 어린이들의 목숨을 구한다
노다무라 어린이집은 지진 쓰나미 당시 노다 만에서 약 500m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어린이집 주변은 평탄한 지형이라 “대지진이 일어나면 쓰나미가 15분 만에 도달한다”고 알려진 침수구역 내 지정피난장소까지는 약 1km 떨어져 있었습니다. 15분 이내에 어린이들을 피난시키는 일은 매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어린이집에서는 월 1회의 대피훈련을 거르지 않고 평소부터 빠른 걸음으로 산책을 해 왔습니다. 유아 7명 정도가 탈 수 있는 수동 유모차를 "대피차"로서 구입했습니다. 500m 앞의 고지대에 있는 민가의 밭을 가로지를 수 있도록 양해를 얻어 대피경로를 짧게 만드는 등과 같은 대책을 세워 왔습니다.
지진 쓰나미 당일은 우연하게도 월 1회 실시되는 훈련일이었습니다. 직원들이 아이들을 낮잠에서 깨우고 있었을 때 큰 흔들림이 발생했고, 0살짜리 아기는 아기띠로 업고, 1살짜리 아이는 대피차에 싣고, 그 외의 어린이들은 실내화 차림으로 훈련대로 대피를 시작해 높은 지대의 민가 앞에 도착했습니다. 그 후 쓰나미가 보였기 때문에, 사전에 만일의 쓰나미 대피 시 통행의 양해를 얻고 있었던 밭을 가로질러 미리 정해 두었던 대피장소에 도착했습니다.
당시의 주임 보육사는 "대지진이 오면 '겐페이자카 비탈길'로 달아나라."라던 현지 주민들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사실 쓰나미는 겐페이자카 비탈길 아래의 호리바시 다리 부근까지 밀려와 있었습니다.
선인의 가르침과 평소의 훈련 성과 덕분에 어린이들과 직원 약 100명이 무사히 대피했습니다. 우는 어린이는 한 명도 없었습니다.
Case-4 이와테현 이와이즈미초 오모토 초등학교의 사례
주민의 직접적인 의견으로 적절한 시기에 대피계단이 신설돼 바다로 향하는 대피경로가 개선
큰 피해를 입은 이와이즈미초립 오모토 초등학교의 구 교사는 쓰나미로 인해 마루 위가 침수되었고, 교정과 체육관은 잔해물과 휩쓸려 온 차로 가득 찼습니다. 그러나 지진재해 쓰나미 당일 교내에 있었던 88명의 아동 중에는 1명의 희생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오모토 초등학교의 종래 대피경로는 교사 서쪽의 급사면을 피하도록 우회한 경로였습니다. 이것은 쓰나미 침수 예상 구역을 지나면서, 일단 바다 쪽으로 가다가 국도까지 나오면 대피하는 경로였습니다.
주민들은 "아이들이 쓰나미가 밀려 오는 방향으로 향하면서 피난해야 하는 것은 위험하다."며 계속 호소해 왔고, 정장과 국토교통성 산리쿠 국도사무소가 협의를 진행했습니다. 지진재해 쓰나미 발생 2년 전인 2009년 3월에 교사로부터 바다로 향하지 않고 국도로 나갈 수 있는, 길이 약 30m, 130단의 대피계단이 완성되었습니다.
이 계단 덕분에 대피경로도 짧아져 대피에 필요로 하는 시간도 큰 폭으로 단축시킬 수 있었습니다.
지진재해 쓰나미 당일 아이들은 예상밖의 속도로 밀려오는 쓰나미로부터 피하기 위해 대피계단을 필사적으로 뛰어 올라 고지대의 광장으로 대피했습니다. 전원이 무사히 달아날 수 있었습니다. 국도를 건넌 다음부터는 소방단이 아이들을 이끌어 주었습니다.
Case-5 이와테현 가마이시시 가마이시히가시 중학교의 사례
가마이시의 사례에서 배우는 철저한 대피 3원칙. 살아 있는 방재교육
가마이시 시내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우노스마이 지구. 당시 가마이시시립 가마이시히가시 중학교는 바다에서 불과 500m 떨어진 장소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지진 쓰나미가 발생했을 때 학생들은 "쓰나미가 온다"라고 외치면서 사전에 정해진 대피장소로 달렸습니다. 이웃에 있는 가마이시시립 우노스마이 초등학교의 초등학생들도 그 소리를 듣고 함께 대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대피장소 뒤쪽의 절벽이 무너져 돌멩이가 떨어지는 것을 본 주민이 가마이시히가시 중학교 교사에게 전하면서 더 높은 곳으로 대피하도록 했습니다. 아동ㆍ학생과 교직원, 우노스마이 어린이집 아이들과 인근 주민도 포함해 600명 이상이 더 높은 곳에 있는 요양복지시설로 대피했고, 전원이 거기서 더 높은 고지대로 향했습니다. 중학생들은 초등학생들의 손을 잡아주고, 어린이들이 탄 손수레를 밀거나 유아를 업고 뛰기도 했습니다.
최초의 대피장소는 전원이 떠난 지 약 5분 후에 수몰되었습니다. 쓰나미는 요양복지시설 앞까지 도달했습니다. 중학생들의 솔선 행동에 따라 간발의 차로 많은 목숨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중학생들은 도움을 받는 쪽이 아니라 도움을 주는 쪽으로서 초등학생이나 어린이집 아이들을 데리고 달아나는 것을 의식하면서 행동하고 있었습니다.
중학생들은 “1. 예상에 사로잡히지 말라. 2. 그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라. 3. 솔선하는 대피행동을 하라”라는 대피 3원칙을 배우고 있었습니다. 산리쿠 지방에 전해져 내려오는 "쓰나미 덴덴코" 즉 "쓰나미가 오면 각자가 어쨌든 달아나라."라는 가르침과 함께 스스로 생각하고, 자신의 목숨은 스스로 지키고, 함께 돕는다는 살아 있는 방재교육의 사례입니다.
Case-6 이와테현 오후나토시 오키라이 초등학교의 사례
지진의 흔들림으로 쓰나미를 직감
즉시 대피 개시, 신설한 피난계단이 아동을 구함
오후나토시립 오키라이 초등학교는 지진 쓰나미 당시 바다에서 불과 200m 떨어진 저지대에 있었습니다. 3층 건물 교사의 도로 쪽은 높이 5m의 절벽 모양이었습니다. 기존의 대피경로는 일단 교사 1층에서 밖에 나가 고지대와 반대 방향에 있는 교문을 빠져나가 70m의 비탈길을 뛰어올라 벼랑 위로 가서, 거기서 더 높은 산리쿠 철도 산리쿠역으로 향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러면 "쓰나미가 왔을 때, 가장 위험한 것은 오키라이 초등학교가 아닌가"라며 호소한 사람은 당시의 현지 시의회 의원이었습니다. "어린이가 1층까지 내려가게 되면 시간이 없어진다. 2층에서 직접 도로로 나오는 것이 빠르다!"라며 대피계단 설치를 오랫동안 제안했으며, 보호자 등 지역의 요망도 있었기 때문에 지진 쓰나미 발생 전년인 2010년 12월에 교사 2층과 벼랑 위의 도로를 잇는, 길이 약 10m, 폭 1.5m의 대피계단이 설치되었습니다.
또한 지진 쓰나미 당일, 매뉴얼에는 흔들림이 가라앉은 다음에 대피하도록 되어 있었지만 “흔들리는 시간이 너무 길다, 쓰나미 도달까지 30분도 남아 있지 않다.”며 학교 측이 판단했습니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흔들리고 있는 동안 대피를 시작했습니다. 아동 71명과 교직원 13명은 설치된 대피계단으로 벼랑 위에 나오자마자 고지대로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에 밀려온 쓰나미로 교사는 휩쓸려 전부 파괴되었습니다. 신속한 대피 시작과 대피계단 덕분에 전원이 무사히 피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