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기

3-1-E

자위대 한시라도 빨리,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기 위해

사상 최대 10만 명 태세

육상 자위대
전력으로 출동! 전원, 도호쿠를 향해 뛰어!

① 도호쿠 방면대 비상소집 6,600명이 다음날 아침부터 연안부에서 활동을 시작

이와테현에서 자위대로 재해 파견 요청이 있었던 것은 지진 발생에서 6분이 지난 14시 52분경. 그 2분 전, 아오모리, 아키타, 이와테의 3개 현을 담당하는 육상자위대 도호쿠 방면대 제9사단의 전 대원에게 각 부대로의 복귀명령이 떨어졌다.
15시 20분 이와테 주둔지에서 지상정찰부대가 출동, 그 10분 후 초동대처부대가 각각 정해진 담당 지구를 향해 전진을 시작했다. 또한 16시 30분 제9사단의 주력부대도 각 주둔지를 출발했다. 도호쿠 방면대 전체에서 출동 총인원 6,600명. 다음날 3월 12일 아침부터 인명구조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도호쿠 방면대 전원, 비상소집! 해안을 향해 뛰어!”
재해 발생 당시 육상막료장이 도호쿠방면총감에게 고한 말이었다.

② 1시간 지연은 1일 지연으로 이어진다 전국 전개를 결단

방위성에서는 “미야기현 앞바다 지진”을 상정한 대응계획이 1년 전부터 작성되어 있었지만, 그 예상은 사망자/실종자 수천 명…. “도호쿠 방면대만으로는 절대 부족하다…. 전국에서 부대를 모아야 한다. 그것도 한시라도 빨리.” 그러나 그런 계획은 어디에도 없었다. "1시간 지연이 1일, 2일의 지연이 된다.” 그런 확신으로 막료장은 전국의 방면대에게 차례차례 지시를 내렸다. “도호쿠를 향해 뛰어!”
도호쿠방면총감에게는 “전국에서 부대를 모은다, 전부를 지휘하라”라고 고했다.
정식으로는 3월 14일에 편성된 사상 최초의 재해통합임무부대(※)에 의한 인명구조 활동이 이 때 시작되었다. 그 활동은 최대 10만 명을 넘는 규모로 확대되어, 8월 31일의 대규모 지진 재해파견 종료까지 연인원 약 1,058만 명을 파견하고, 174일간 이어지게 되었다.

※재해통합임무부대란 육상자위대 도호쿠방면총감의 지휘하에 육상자위대, 해상자위대, 항공자위대에서 육상재해대응부대, 해상재해대응부대, 항공재해대응부대를 편성해 통합하여 운용한 것.

③ 사상 유례가 없는 대규모 훈련의 성과를 바탕으로 재해 발생 시 각 부대는 망설임 없이 연안 담당 지구로 돌진했다

재해 발생 3년 전인 2008년(헤이세이 20년), 사상 유례가 없는 대규모 지진대응훈련 “미치노쿠 ALEART 2008”이 실시되었다. 이 훈련은 높은 확률로 발생이 예상되고 있었던 미야기현 앞바다 지진에 대한 대응을 상정한 것으로, 육상자위대 도호쿠 방면대 전 부대는 물론 다른 방면대, 해상자위대와 항공자위대, 이와테현, 미야기현을 포함해 이와테현 미야코시에서 미야기현 이와누마시까지 태평양에 면한 24개 자치단체, 방재 관련 35개 기관과 함께 일반시민도 포함한 약 1만 8,000명이 참가했다. 피해가 예상되는 현지에서의 전개 훈련이 포함된, 지금까지 유례가 없었던 훈련이었다.
육상자위대 각 부대에는 담당 시정촌이 정해져 있었고, 출동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도로 상황을 확인하면서 바로 현지로 향했다. 대원에게 상세한 훈련 내용은 전해지지 않았고, 담당 지구에서의 활동거점 구축 등 현장에서 상황에 맞는 실천적인 대응이 요구되었다.
훈련 담당 지구는 그 후에도 각 부대의 출동지로 배정되었고, 매년 훈련이 계속되었다. 이러한 축적된 훈련하에서 2011년(헤이세이 23년) 3월 11일 재해 발생 시점, 거의 모든 해안 재해지와의 통신이 두절된 가운데 각 부대는 망설임 없이 각각의 활동거점으로 돌진해 나갔다.

해상 자위대
전 가동 함정은 산리쿠 앞바다로 향하라!

① 해상자위대 1만 6,000명이 재해지로 이동

지진 발생 5분 뒤인 14시 51분, 요코스카 지방총감부는 "제1배치(전원 부대 복귀)"를 발령. 14시 52분, 자위함대 사령관은 해상자위함에 일제 방송으로 대호령을 발령했다.
"전 가동 함정은 산리쿠 앞바다로 향하라!"
자위함대란 함대와 항공기 등 전국에 소재하는 실동부대를 통괄/작전 운용하는 부대. 그 사령부는 전 세계에 전개되는 해상자위대 부대를 일원적으로 지휘할 수 있는 대사령부이다.
여기서 최대 시 함정 약 60척, 항공기 약 100기, 인원 약 1만 6,000명이라는, 해상자위대의 1/3이나 되는 인원을 투입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② 해상자위대의 모든 자원을 활용해 국민을 구해야 한다

해상자위대에서는 대규모 재해가 발생했을 경우 일의적으로는 발생 지역을 맡은 지방총감이 지휘를 하도록 정해져 있다. 이 때문에 산리쿠 앞바다에서 발생한 지진에 대한 대응/지휘는 요코스카 지방총감이 담당한다. 그동안 총감부를 중심으로 준비도 해 왔고 훈련도 해 왔다.
이 때 총감은 이례적인 행동을 했다. 지휘소를 요코스카 지방총감사령부가 아닌, 같은 요코스카이지만 자위함대사령부로 옮긴 것이다.
총감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 활동은 해상자위대 전체가 관여하는 대작전이 될 것이다. 지금은 체면에 연연할 때가 아니다. “해상자위대 전 부대를 재빨리 원활하게 동원하기 위해 지휘소를 옮긴다.” 그것이 바로 총감이 내린 결단이었다. 부하를 앞에 두고 총감은 말했다. "해상자위대의 모든 자원을 활용해 국민을 구해야 한다.”

항공 자위대
눈에 띄는 대로 모든 사람을 구조하라!

① 재해 발생 당일 일몰 후 리쿠젠타카타에서 첫 구조자 발생

항공자위대에서는 재해 발생 직후인 15시 5분, 아오모리현 미사와 기지, 이바라키현 햐쿠리 기지 및 이시카와현 고마쓰 기지에서 F-15 제트기가 발진해 정보수집에 나섰다.
그러나 진원지 부근의 날씨가 악화되고, 구름이 낮게 깔려, 악천후와 강설로 후쿠시마 이남의 정찰비행밖에 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2011년(헤이세이 23년) 3월 11일 이와테현 연안의 일몰은 17시 35분 전후.
시시각각 일몰이 다가오고 있었다. 야간비행을 할 수 있는 헬리콥터는 자위대와 해상보안청만 보유하고 있다.
밤이 되어서야 비로소 진원지 가까이로 들어가게 되었다. 시계는 깜깜했다. 해안선에 불빛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평소와는 달랐다. 바다와 육지가 구별이 되지 않는다. 그저 타오르는 불길만 보일 뿐이었다. 철탑이나 송전선 등 보이지 않는 장애물과의 접촉 위험을 안고 해안선 정찰이 계속되었다.
이런 가운데 18시 10분 미사와 기지의 헬리콥터 부대가 리쿠젠타카타시에서 11명의 피난자를 구조했다. 이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구조활동이 개시되었다.

② 잠도 자지 않고 휴식도 없이 구조작업이 전개되었다

항공자위대의 지령은 간결했다.
“눈에 띄는 대로 모든 사람을 구조하라!”
72시간이 생사의 분기점이라는 점에서 지금까지 유례가 없는 72시간 연속 정찰기/구조기 운용체제가 시작되었다. 가능한 한 많은 인명을 구하기 위해 우선 전력을 다해 노력한다. 이것이 미션이었다.
재해지가 된 도호쿠 지방 태평양 측에 가까운 기지로서 햐쿠리 기지에 전국으로부터 구조기가 집결했다. 통상 인원 80명을 200명으로 늘리고, 비행기는 3대에서 14~15대로 증강되었다. 격납고는 구출활동에 필요한 물품들로 채워졌다.
이 기지에서 이륙한 구조기 승무원들은 1회 상공에 올라가면 5~6시간, 긴 경우는 11시간 연속 비행을 하면서 구조를 원하는 사람 쪽으로 강하하여 끌어올린다. 학교, 공민관, 민가 등 한 집 한 집 확인하고, 발견한 사람을 대피소나 안전한 수용 장소로 옮겼다. 기지로 귀환한 다음 잠깐 수면을 취한 후 다시 비행기에 오른다. 이렇게 3일 동안 1,353명을 구조하고※, 위급환자 60명을 옮겼다.
재해 발생 후 1주일 동안 조종사 1인의 비행시간 40~50시간은 통상의 1, 2개월분에 해당한다. 정비대원들도 불면불휴의 체제로 거의 한 달을 보냈다.

※항공자위대 전체에서 구조한 사람은 3,471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