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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나미 대책의 발자취

근대 이전의 쓰나미 대책은 둑이나 방조림, 방파림 등이 있으며, 근대 이후에는 콘크리트제 제방이나 수문 등과 같은 구조물 건설이 대책으로서 추진되었습니다. 현대에는 하드웨어적인 대책과 함께 방재조직 육성이나 방재교육, 피난훈련 등 소프트웨어적인 대책도 포함한 종합적인 대책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쓰나미 예보는 산리쿠 연안을 대상으로 1941년(쇼와 16년)에 시작되었고, 1952년(쇼와 27년)에는 일본 전국을 대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남미 칠레의 지진에 의한 쓰나미로 큰 피해가 발생한 1960년(쇼와 35년)의 칠레 지진 쓰나미를 계기로 국제 협력 체제도 정비되었습니다. 나아가 동일본 대지진 쓰나미를 계기로 쓰나미 경보 등의 개선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1 1896년(메이지 29년) 이후 메이지 산리쿠 지진 쓰나미와 대책

지역의 유지/유력자에 의한 고지대 이전

당시에는 재해 복구나 대책 사업에 임하면서 공적인 기본방침이나 공적 자금 사용의 규칙을 정하려는 발상은 없었고, 개별적으로 대책이 이루어졌습니다. 주된 대책은 현지의 유지/유력자들이 중심이 된 고지대 이전이었습니다. 요시하마(현재의 이와테현 오후나토시 산리쿠초 요시하마 혼고) 등 현재까지 계속되는 성공 사례는 있지만, 대부분은 10년 정도 지나면 원래의 장소로 되돌아간다는 결과를 볼 수 있었습니다. 어업 관계자에게 있어서는 작업장이 되는 해변이 멀다는 점, 고지대의 음용수 부족, 교통의 불편,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에 대한 집착, 쓰나미 미경험자의 이주 등이 이유였습니다.

메이지 산리쿠 지진 쓰나미 1896년(메이지 29년) 6월 15일(구력 5월 5일, 단오절)

19시 32분, 산리쿠 연안에서 진도 2 정도의 지진이 발생. 약 30분 후에 갑자기 대형 쓰나미가 각지를 강타했습니다. 이것은 지진의 진동이 작아도 큰 쓰나미가 발생하는 “쓰나미 지진”이었습니다. 아오모리현, 이와테현, 미야기현 등에서 사망자가 약 2만 2,000명, 유실되거나 전파/반파된 가옥이 1만 채 이상 발생하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자연재해가 많은 국토

일본은 전세계에서도 자연재해가 많은 나라 중 하나입니다.
일본열도는 지구를 덮고 있는 열 몇 장의 플레이트 중 4장의 플레이트의 경계에 위치해 있고, 복잡한 해안선을 가진 섬나라로 전세계 활화산의 약 10%가 모여 있습니다. 또한 해안에서 산악까지 거리가 가깝고 표고차가 크기 때문에 급류 하천이 많습니다.
이러한 국토의 위치나 지형, 기상 등의 자연조건으로 인해 일본에서는 지진이나 쓰나미뿐만 아니라 화산폭발, 홍수나 토사재해, 태풍, 호우, 폭설 등의 자연재해가 발생하기 쉬운 것입니다.
여기서는 일본이 추진해 온 쓰나미 재해 대책을 중심으로, 과거로부터 계승해 온, 자연에 대처하는 지혜와 기술 등에 대해 소개합니다.

근대 이전에 정비된 해안 제방

와카야마현 히로무라(현재의 히로가와초)에서는 무로마치 시대(15세기 초)에 방파 돌제방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1854년(안세이 원년)의 안세이 난카이 지진 쓰나미 이후에는 돌제방 안쪽에 방파/방조림과 길이 약 600m에 달하는 제방이 세워졌습니다. 이 공사는, 밤에 밀려온 쓰나미로부터 대피하지 못한 마을 사람들에게 볏가리(볏짚 꾸러미)에 불을 질러 대피 방향을 알린 “볏가리의 불”로 유명한 하마구치 고료가 지휘했습니다. 이러한 대비책은 1946년(쇼와 21년) 쇼와 난카이 지진 쓰나미 때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15세기 초에 세워진 돌제방(바다 쪽)과 에도 시대에 하마구치 고료가 조성한 소나무 가로수와 흙제방.

2 1933년(쇼와 8년) 이후 쇼와 산리쿠 지진 쓰나미와 대책

정부/현 주도로 이루어진 고지대 이전과방조림의 정비

문부성(당시)의 지진재해예방위원회가 재해 발생 3개월 후에 “쓰나미 재해 예방에 관한 주의서”(1933)(※)를 공표했습니다. 이에 따라 당시의 내무성이 부흥계획을 입안하고, 정부와 현의 주도로 고지대 이전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와테현에서는 18개 정촌 38개 마을이 집단으로 이전했습니다. 또한 이와 동시에 방조림도 대대적으로 정비되었습니다. 한편, 이전을 위한 충분한 용지를 확보하지 못한 다로무라(현재의 이와테현 미야코시 다로) 등에서는 방조제를 건설하고 주민은 그 배후에 거주한다는 방침이 정해졌습니다. 당시에 콘크리트 구조물은 고가였기 때문에 방조제는 다로를 비롯해 이와테현 내의 가마이시와 야마다 등에 축조되었을 뿐입니다.

※쓰나미 재해의 예방법으로서 "고지대 이전, 방파제, 방조림, 호안, 방파지구, 완충지구, 피난도로, 쓰나미 경계, 쓰나미 피난, 기념사업"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쇼와 산리쿠 지진 쓰나미 1933년(쇼와 8년) 3월 3일

2시 31분, 산리쿠 앞바다에서 리히터 규모(M) 8.1의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이와테현 연안 등에서 진도 5를 관측했습니다. 지진 후 30분부터 1시간에 걸쳐 홋카이도에서 산리쿠 연안까지 쓰나미가 밀려들었습니다. 사망자/실종자는 홋카이도, 아오모리현, 이와테현, 미야기현에서 3,000명 이상, 유실, 파괴, 소실, 침수 등의 피해를 입은 가옥은 1만 채를 넘었습니다.

"덴덴코"의 가르침

"덴덴코"란 "각각, 각자가"라는 의미의 방언으로 이와테현의 산리쿠 연안에는 “쓰나미가 오면 덴덴코”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쓰나미가 오면 주위에 신경쓰지 말고 각각, 각자가 알아서 도망가거라"라고, 부모에게서 자식에게로, 또 손자에게로 전해져 왔습니다. 쓰나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다는, 반복되는 비극에서 생겨난, 생명을 지키기 위한 강한 메시지를 담은 가르침입니다.

3 1960년(쇼와 35년) 이후 칠레 지진 쓰나미와 대책

구조물 주체의 대책이 진전됨

칠레 지진 쓰나미의 높이는 도호쿠 지방 태평양 연안에서는 4~6m였기 때문에 쇼와 산리쿠 지진 쓰나미 후에 세워진 방조제가 유효하게 기능했습니다. 이로 인해 구조물이 주체가 된 대책이 추진되었고, “칠레지진 특별조치법”(1960)(※1)에서는 해안 제방, 하천 제방, 방파제, 방조제, 수문 등을 신설하거나 개량하는 것이 중심 내용이었습니다. 그 배경에는 콘크리트 구조물의 축조기술 향상과 더불어 고도경제성장에 따라 경제력이 높아진 점도 들 수 있습니다.
또한 하와이 등으로부터의 쓰나미 정보가 활용되지 못한 것을 계기로 국제 간 협력체제가 확립되어, “원격지 쓰나미(※2)”에 대한 연구와 예보 체제도 크게 발전했습니다.

※1 "쇼와 35년 5월 칠레 지진 쓰나미로 재해를 입은 지역에서의 쓰나미 대책사업에 관한 특별조치법"
※2 엄밀한 정의는 없지만, 일본 연안에서 대략 600km 이상 떨어진 먼 곳에서 발생한 지진에 의한 쓰나미를 말합니다.

칠레 지진 쓰나미 1960년(쇼와 35년) 5월 24일

일본의 태평양 연안에 지진도 없었는데 갑자기 쓰나미가 몰려왔습니다. 원인은 남미 칠레에서 일본시간 5월 23일 4시 11분에 발생한 모멘트 규모(Mw) 9.5의 관측사상 세계 최대의 거대 지진이었습니다. 다음날 24일 2시부터 7시까지에 걸쳐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까지의 넓은 범위에서 높이 1~6m의 쓰나미를 관측했습니다. 각지의 사망자/실종자는 142명. 먼 곳을 진원으로 하는 지진에 의해 발생해 몰려온 “원격지 쓰나미”였습니다.

마을을 지킨 후다이 수문

이와테현 후다이무라의 후다이 수문은 높이가 15.5m입니다. 1972년(쇼와 47년)에 착공한 후 12년에 걸친 공사 끝에 완성되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신설된 방조제 등의 일반적인 높이는 10m였지만, 후다이무라에서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던 메이지 산리쿠 지진 쓰나미의 높이 15.2m를 상정하여, 이를 넘는 높이로 건설되었습니다. 동일본 대지진 쓰나미에서는 약간의 쓰나미가 수문을 넘었지만, 마을 중심부는 침수를 면했고, 수문 안쪽에서 희생자는 제로였습니다.

4 1980년대 이후 구조물, 도시조성, 방재체제의 3가지를 조합한 종합적 쓰나미 대책으로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지금까지처럼 쓰나미 재해 후에 대책을 논의하는 게 아니라 사전에 쓰나미 상습지역(산리쿠 지역)에서의 대책을 검토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습니다. 그 결과로 1983년(쇼와 58년) 3월에 완성된 “쓰나미 상습지역 종합방재대책지침(안)”(건설성 하천국 1983, 건설성과 수산청의 공동조사)에서는 높이에 한계가 있는 구조물만으로 완전히 쓰나미를 막는 것은 불가능함을 인식하고, “방재시설, 방재지역계획, 방재체제”의 3가지를 조합한다는 것이 명기되었습니다.
그 후 1993년(헤이세이 5년) 7월에 발생한 홋카이도 남서 앞바다 지진 쓰나미가 계기가 되어 7개 성청(※)이 합의한 “지역방재계획에 있어서의 쓰나미 방재대책 강화 가이드라인”(1997)에도 상기 3가지를 조합한 종합적 쓰나미 대책이라는 개념이 이어졌으며, 하드웨어적인 대책에만 의존하는 사고방식의 전환이 도모되었습니다.
나아가 2004년(헤이세이 16년)에 내각부 등에 의해 “쓰나미/해일 해저드 맵 매뉴얼”이 완성되었고, 쓰나미 피해 시뮬레이션과 쓰나미 해저드 맵 작성이 각지에서 진행되는 등 소프트웨어적인 대책이 진전되어 왔습니다.
동일본 대지진 쓰나미의 피해를 목격한 오늘날, 하드웨어적/소프트웨어적 대책을 한층 더 충실하게 하고, 그와 동시에 우리 개개인의 방재의식 향상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국토청, 농림수산성 구조개선국, 농림수산성 수산청, 운수성, 기상청, 건설성, 소방청(모두 당시 명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