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새겨진 쓰나미
"산리쿠"라는 지역 명칭에 대하여
"산리쿠"란 메이지 시대(1868-1912)의 지역 명칭이었던 리쿠오, 리쿠추, 리쿠젠의 총칭입니다.
현재는 주로 아오모리현 하치노헤에서 이와테현, 미야기현 오시카 반도에 걸친 연안지역을 일컫는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지진 규모의 표기에 대하여
지진 규모를 나타내는 척도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기 때문에, 사용하고 있는 계산식이나 지진 관측망이 다르면 서로 다른 수치로 표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당관의 전시에서는 지진파의 진폭으로 계산한 "매그니튜드(M)"를 기본으로 하고 있으며, 동일본 대지진 쓰나미 및 해외에서 발생한 지진에 대해서는 암반의 엇갈림 규모를 기본으로 계산한 "모멘트 매그니튜드(Mw)"로 기재하고 있습니다.
869년 7월 13일
조간 지진 쓰나미
기록에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도호쿠 쓰나미
869년 7월 13일(조간 11년 5월 26일) 밤, 현재의 도호쿠 지방 태평양 측에서 대지진과 거대한 쓰나미가 발생했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정부가 편찬한 “일본 삼대 실록”에 기록되어 있으며, 일본의 기록에 남아 있는 쓰나미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사례입니다. 당시 진수부가 설치되어 있었던 다가성(현재의 미야기현 다가조시)에서는 성곽과 창고, 문 망루, 담벽 등이 다수 붕괴되었습니다. 그 후 쓰나미가 성 아래까지 몰려들었고, 다가성 주변은 온통 바다에 잠겼으며, 대피하지 못한 1,000명 정도의 주민이 익사했습니다. 이 쓰나미로 인한 퇴적물은 센다이 평야에서부터 이와테현 연안까지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지진 규모는 매그니튜드(M) 8.3 내지 8.4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 지진 규모 M8.3 이상
- 진앙(추정) 산리쿠 앞바다
- 주요 쓰나미 피해 지역 도호쿠 지방 태평양 연안
- 희생자 미야기현 다가조시 주변 익사 1,000명(사료를 통해 판명된 숫자)
1611년 12월 2일(게이초 16년 10월 28일)
게이초 오슈(산리쿠) 지진 쓰나미
에도시대의 대형 쓰나미
- 지진 규모 M8.1 이상
- 진앙(추정) 산리쿠 앞바다
- 주요 쓰나미 피해 지역 도호쿠 지방 태평양 연안
- 희생자 이와테현, 미야기현, 후쿠시마현 약 3,500명(사료를 통해 판명된 숫자)
1611년 12월 2일(게이초 16년 10월 28일) 오전, 현재의 도호쿠 지방에서 도쿄에 걸친 넓은 범위에서 지진이 있었습니다. 그 후 오슈(현재의 도호쿠 지방 태평양 측) 연안을 쓰나미가 덮쳐 센다이번에서는 1,783명, 소마나카무라번에서는 700명이 익사했습니다. 모리오카번 연안에서도 오쓰치무라(현재의 오쓰치초)에서 800명이 익사하는 등 각지에서 큰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이 쓰나미를 목격한 스페인 탐험가 비스카이노의 보고서에 따르면 이마이즈미(현재의 리쿠젠타카타시)에서는 가옥이 거의 전부 유실되었고, 50명 정도가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종래의 연구에서는 지진 규모 매그니튜드(M) 8.1 정도로 간주되어 왔지만, 동일본 대지진 쓰나미 이후의 연구에 따르면 더 큰 지진 규모였을 것이라고도 합니다.
1896년 6월 15일(메이지 29년 6월 15일)
메이지 산리쿠 지진 쓰나미
약한 진도의 지진에도 큰 쓰나미가 발생
- 지진 규모 M8.2 이상
- 진앙(추정) 산리쿠 앞바다
- 주요 쓰나미 피해 지역 아오모리현, 이와테현, 미야기현
- 희생자 약 22,000명(그중 이와테현 18,158명)
1896년(메이지 29년) 6월 15일 19시 32분, 산리쿠 연안에서 진도 2 정도의 지진이 발생했고, 약 30분 후에 갑자기 대형 쓰나미가 각지를 강타했습니다. 이것은 지진 진동이 작더라도 큰 쓰나미가 발생하는 “쓰나미 지진”이었습니다.
이 쓰나미로 인한 사망자는 아오모리현, 이와테현, 미야기현 등에서 약 2만 2,000명, 유실되거나 전파/반파된 가옥은 1만 채 이상에 달했습니다. 특히 이와테현이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연안 가구의 약 절반이 소실되었고, 연안 주민의 4분의 1이 희생되었습니다. 전멸한 마을도 있었습니다. 이 쓰나미의 1개월 후 도노의 실업가 야마나 소신은 연안의 재해지역을 걸어서 조사했고, 그 피해를 극명하게 기록한 “이와테현 연안 거대 쓰나미 조사 보고서”를 남겼습니다.
1933년 3월 3일(쇼와 8년 3월 3일)
쇼와 산리쿠 지진 쓰나미
아우터라이즈 지진(해구의 바다쪽에서 발생한 지진)으로 발생한 대쓰나미
- 지진 규모 M8.1 이상
- 진앙(추정) 산리쿠 앞바다
- 주요 쓰나미 피해 지역 홋카이도, 아오모리현, 이와테현, 미야기현
- 희생자 약 3,000명(그중 이와테현 2,671명)
1933년(쇼와 8년) 3월 3일 2시 31분, 산리쿠 앞바다에서 리히터 규모(M) 8.1의 아우터라이즈 지진(※)이 발생해, 이와테현 연안 등에서 진도 5를 관측했습니다. 지진 후 30분부터 1시간에 걸쳐 홋카이도에서 산리쿠 연안까지 쓰나미가 강타해 각지에 큰 피해를 가져왔습니다. 이 쓰나미로 인한 사망자/실종자는 홋카이도, 아오모리현, 이와테현, 미야기현에서 3,000명 이상, 유실, 파괴, 소실, 침수 등의 피해를 받은 가옥은 1만 채를 넘었습니다. 또한 이 쓰나미로 인해 화재가 발생해 다로무라(현재의 이와테현 미야코시)에서는 화재로 40명이 사망, 가마이시초(현재의 이와테현 가마이시시)에서는 번화가에서 시작된 화재가 산불을 일으키면서 299가구가 소실되었습니다.
그 후 쓰나미의 위험성을 미래에 전하는 기념비가 각지에서 세워졌습니다.
※아우터라이즈 지진에 대해서는 "1-2 반복되는 지진 쓰나미의 역사" 패널에 있는 "지진에 의한 쓰나미 발생의 메카니즘"(모니터)을 참조해 주십시오.
지진 발생일(현지시간) 1960년 5월 22일
일본에 쓰나미가 도달한 날(일본시간) 1960년 5월 24일(쇼와 35년 5월 24일)
칠레 지진 쓰나미
태평양을 건너 온 원격지 쓰나미
- 지진 규모 Mw9.5
- 진앙(추정) 칠레 남부 앞바다
- 주요 쓰나미 피해 지역 칠레, 환태평양
- 희생자 (일본국내) 142명(그중 이와테현 62명)
1960년(쇼와 35년) 5월 24일 2시부터 7시까지에 걸쳐 지진도 발생하지 않았는데 일본의 태평양 연안에 갑자기 쓰나미가 몰려왔습니다. 이 쓰나미의 원인이 된 것은 남미 칠레에서 일본시간 5월 23일 4시 11분에 발생한 모멘트 규모(Mw) 9.5의 관측사상 세계 최대의 거대 지진입니다. 이 지진에 따라 홋카이도에서 오키나와까지의 넓은 범위에서 쓰나미가 관측되었고, 도호쿠 지방 태평양 연안을 4~6m의 쓰나미가 강타했습니다. 이 쓰나미로 인한 각지에서의 사망자/실종자는 142명이었습니다.
이 당시 기상청에는 “원격지 쓰나미”(※)를 관측한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쓰나미 경보 발령이 늦었습니다. 이 칠레 지진이 계기가 되어 1965년(쇼와 40년)에 하와이 호놀룰루에 ITIC(국제 쓰나미 정보센터)가 설립되는 등 쓰나미 예보에 관한 국제협력이 추진되었습니다.
※엄밀한 정의는 없지만, 일본 연안에서 대략 600km 이상 먼 곳에서 발생한 지진에 의한 쓰나미를 말합니다.
2011년 3월 11일(헤이세이 23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 쓰나미(도호쿠 지방 태평양 앞바다 지진 쓰나미)
일본 최대의 지진 규모, 미증유의 쓰나미 피해
- 지진 규모 Mw9.0
- 진앙(추정) 산리쿠 앞바다
- 주요 쓰나미 피해 지역 동일본 태평양 연안, 환태평양
- 희생자 (일본국내) 사망자/실종자 22,252명(그중 이와테현 6,255명)
2019년 3월 1일 현재/소방청, 관련 사망자 포함
2011년 3월 11일 14시 46분, 산리쿠 앞바다를 진원으로 하는 매그니튜드(Mw) 9.0의 초거대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일본 열도 전체가 흔들렸고, 미야기현 구리하라시에서 최대 진도 7, 이와테현 전역에서 진도 4~6강을 관측했습니다. 거대한 쓰나미가 태평양 연안의 넓은 범위에 밀려들었습니다. 내륙 깊숙이까지 침수해 마을과 시가지가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고, 도쿄전력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의 사고, 대규모 화재, 액상화, 지반 침하 등으로도 큰 피해가 발생했습니다. 사망/실종자 2만 2천 명 이상, 가옥 전체 파괴 40만 채 이상이라는 미증유의 복합적 대재해가 일어난 것입니다.